책을 다시 읽으며 이게 이런 작품이었나 하고 놀랐다.
다시 접한 난쏘공은 28년 전보다 더 섬뜩하고 더 아름답고 더 슬프고 더 심오하게 다가왔다.1980년대에 이 소설이 받았던 비판 중에는 부당하다 못해 이제는 어이없게 들리는 것도 있다.
그 평론가는 문학이 혁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나 보다.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는 말마저 있었던 모양이다.그런 문장들을 나는 전에 부주의하게 넘겼거나.
혹은 반도체나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 많이 하는 그 대기업이 거인인가? 그런데 왜들 ‘잘 사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심성이 곱다고 말하고 대기업 직원이 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걸까.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한심하도록 이분법적이었다.
명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사이다.
출처는 정확히 모르겠고 민중문학 진영의 평론가가 그런 발언을 했다고 2000년대 기사들에 인용된 것만 보았다.이 교향곡의 주요 주제는 귀에 쏙쏙 들리는 선율과는 거리가 멀고.
브람스와 바그너의 작품은 보통 한 무대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이다.대위적 짜임새가 현학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오희숙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그렇지만 음악이 흐르면서 점점 몰입감을 상승시켰고.